세월이 많이 흘렀다. 1991년 노태우정부 시절 반독재 민주화운동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 당시 재야단체 전민연(전국민족민주연합) 간부였던 강기훈이 당시 서강대 청강생 김기설 분신의 유서를 대필했다는 누명을 쓰고 긴 옥살이와 형용할 수 없는 고통속에 살아온 세월이 그렇게 흘렀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의 노력으로 이 재판은 재심이 이루어지고 그 결과 대법원은 강기훈의 유서대필이 무죄임을 최종 확정했다.
그 무심한 세월동안 강기훈의 잘생긴 얼굴은 깊은 주름과 함께 수심이 가득해졌으며 치명적인 중병을 얻어 그 생명을 장담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나는 1991년 당시 몸담고 있던 전민련을 떠나 정당에 입당했다. 그래서 강기훈의 면회 한 번 가보지 못한 탓에 마음속에 빚을 담아두고 있었는데 이번에 재심의 결정과정과 재판과정을 주의깊게 살펴보면서 어디인지 모르는 곳에서 오는 한 가닥의 양심의 흔적을 보게 되었다.
사회는 진화한다.
지금의 법조계, 특히 검찰은 과거의 것이 아니고 분명 진화하였다. 그 진화는 그 법조계에 속한 사람들의 노력과 사회환경의 변화에 따른 것이다. 이 과정에서 점차 새로 충원된 엘리트 검사들과 판사들의 지속적인 역할이 컸다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은 밑에서부터 권력의 정점에 대한 작고 조용한 문제제기에서부터 때때로 큰 소리를 내는 충돌에 이르는 과정이었다. 그러므로 지금의 법조계, 특히 검찰이 1991년 시절의 가치로 판단될 수 없다. 그러나 또한 진화는 대부분 매우 느리게 가는 것이어서 옛날의 잘못된 전통과 관행이 모두 없어졌다고 볼 수 없다.
이제 강기훈 유서대필 사건의 무죄판결을 계기로 지금 우리 사법제도의 문제를 좀 더 유심히 들여다보고 남아있는 구시대의 낡은 제도와 관행을 고쳐나가는 것이 매우 필요하다. 그것은 과거에도 그랬지만 지금도 정권의 공공연한 또는 은밀한 관여나 간섭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그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이제 강기훈 유서대필 무죄판결을 계기로 국회에서 청문회를 개최하여 이 사건에 대한 의미를 잘 정리를 해두고 우리 법조계가 한 단계 진화하는 계기로 삼았으면 하는 소망을 나는 가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