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계륜과 광주항쟁

지역을 넘어 세대를 넘어 빈부를 넘어선 신계륜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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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한을 남긴 서울역 대규모 시위가 군부의 전면 등장으로 끝을 맺고 수배가 내려지자 신계륜은 5월 18일 수배를 피해 광주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광주에서 학살이시작되고 항쟁이 시작되리라는 것을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신계륜이 5월 18일 단지 수배를 피해 광주로 내려간 것은 한마디로 운명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을 것같다.


그렇게 신계륜은 80년 5월 광주항쟁을 운명처럼 만났다.


5월 18일 밤부터 계엄군이 도청을 점령하는 5월 27일 새벽까지 신계륜은 광산군 송정리(현재광주시 광산구)의 절친한 친구의 집에 있었다.


언니 잃은 여고생의 절규, 주먹을 불끈 쥔 시위대와 공수부대 그리고 그 눈빛, 시민군의 차량들, 주검들 특히 어린 주검들 그리고 광주시민 모두의 가슴에 결코 씻을 수 없는 한을 남기게 한 27일 새벽 계엄군의 선무방송과 총소리... 신계륜은 그로부터 “군사정권과는 같은 하늘에 살지 않으리”라고 맹세했다고 여러번 밝혔다.

신계륜의 어머니는 차량이 끊긴 월야집에서 터벅터벅 걸어서 광주에 와 아들의 소재를 물으며 시위대 사이를 그리고 병원의 영안실들을 헤매고 다녔다. 그것은 수많은 어머니들의 아들, 딸들을 찾는 피어린 절규였고 투쟁의 모습이었다.

신계륜은 어머니가 그토록 처연하게 아들을 광주의 거리를 헤메는 것을 알고도 어머니 뒤를 따라 현상금과 1계급 특진을 노리는 형사들의 감시를 알고 끝내 어머니에게 살아있다는 말도 전하지 못했다. 그리고 도청이 계엄군에 점령당하자 이번에는 광주에서의 검거 선풍을 피해 광주에서 다시 서울로 탈출했다.

(자세한 내용은 신계륜 저 ‘내 안의 전쟁과 평화’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