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바 김대중 내란 음모사건

지역을 넘어 세대를 넘어 빈부를 넘어선 신계륜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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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신만고 끝에 장성역을 통해 광주 탈출에 성공한 신계륜에게는 “극한적 학원소요 사태와 광주 사태의
배후 조종자 및 주동 극렬 분자”라는 긴 이름의 지명수배자 딱지가 붙었다. 수배전단은 신문과 방송에서
수시로 보도되고 길거리의 전봇대에도 펄럭거리며 동네 가게의 유리창 안에도 빠짐없이 붙어있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용케 30여일 정도를 여러 선배 친구들의 도움으로 피해 다니다가 체포되던 순간을
신계륜은 그의 저서 내안의 전쟁과 평화라는 책에서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어느 날 아침 신문을 보고 있는데 초인종이 울렸다. 맨 뒷방에서 혼자 지내던 나는 귀를 기울이며 조용히 일어나 창문 앞에 섰다. 약 2~3초 후 친구 여동생의 놀라는 소리가 들렸다. 
‘올 것이 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자 본능적으로 창문을 넘었다. 창문 아래 미리 준비해둔 구두를 신고 수유리 야산으로 이어진 담장을 넘으려는 순간 이마에 차가운 쇠붙이가 느껴졌다. 권총이었다. 순간 나는 ‘아!’하는 탄식과 함께 힘을 잃고 비틀거렸다. 순간 7~8명의 사복이 나를 에워다. 친구는 어쩔 줄을 몰라 하고 동생들은 울먹이는 사이로 출동한 수십명의 경찰이 보였다. 찰버스도 보였다. 완벽하게 포위됐다“ 이날로부터 신계륜은 군경합동수사본부로 끌려가 약 두달 동안을 아무도 만나지 못한채 혹독한 고문과 취조에 시달렸다. 


신계륜은 서울역 시위의 주동자일 뿐만 아니라 광주항쟁의 현장에 내려와 있었고 광주 출신이므로 누구보다도 김대중 내란음모로 엮어내기 좋은 조건을 갖춘것으로 판단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합동수사본부도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으로 신계륜을 기소하지 못했다. 단지 계엄포고령 위반으로 구속했을 뿐이었다. 그는 버티었다. 꼬리뼈에 금이 가는 상처를 당하고도 끝내 시인하지 않았다.

신계륜은 군법회의에서 1년 6개월의 징역형을 선고 받고 내란음모 조작에 협조하지 않은대가로 사면 없이 가석방도 없이 눈이 많이 내리던 겨울날 새벽 의정부 교도소를 만기 출소했다.